일본 731부대의 생체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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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1부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일본 육군이 중국에서 활동한 유비키 유니트 731로도 알려진 부대로, 인간 실험과 생물학적 무기 연구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래는 731부대의 생체실험에 대한 주요 내용입니다.

 

미군의 탄저균 실험

미국은 2차 대전이 끝나고 처단해야 할 일본의 전쟁전범들을 대부분 풀어주었습니다. 게다가 일본의 생체실험보고서를 돈을 주고 사들였습니다. 2015년 한국에서도 탄저균이 논란이 됐습니다. 주한미군은 오랫동안 한국 정부에 알리지 않고 탄저균을 오산 공군기지로 들여와 훈련용으로 실험했습니다. 그런 사실이 알려지자 우리 국민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확인된 것만도 2009년부터 무려 16차례 탄저균을 들여왔다고 했습니다. 미군은 몸에 해가 없는 탄저균 사균(死菌)이라 주장했지만, 9.11 테러 직후의 탄저균 테러를 기억하는 많은 시민들은 탄저균의 '탄' 자만 들어도 걱정이 들기 마련입니다.

미국의 탄저균의 원조는 '죽음의 부대' 또는 '악마의 부대'라 일컬어지는 731부대의 수괴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1892-1959)입니다. 미국-이시이 사이의 더러운 비밀거래는 걸음마 단계에 있던 미국의 세균전 능력을 크게 높였습니다. 과거  이시이 시로의 731부대는 문제의 탄저균 개발에 나섰습니다. 731부대가 '악마의 부대'라 비난을 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살상무기를 개발하면서 산 사람을 생체실험으로 희생시켰다는 사실입니다. 

 

말뚝에 묶고 생체실험

731부대는 수많은 인간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이 실험은 주로 감염병에 대한 연구, 생체무기의 개발, 독가스 효과 등을 포함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신경가스, 생화학적 무기 및 다양한 감염병에 노출시켜 그 효과를 조사하는 등의 실험이 이루어졌습니다. 731부대는 생물학적 무기의 개발을 목표로 다양한 실험을 실시했습니다. 인간 실험체를 이용하여 생체 무기의 효과 및 확산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생체실험을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이 저공비행을 하면서 세균폭탄, 또는 페스트를 비롯한 세균에 감염된 벼룩을 떨어트리는 것이었습니다. '마루타'(피실험자)를 기둥에 묶어놓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전기 장치를 이용해서 폭탄을 터트리는 방식도 썼고  야외실험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약 2시간 정도 관찰을 한 뒤 피실험자를 (731부대 안의) 감옥에 다시 가두고 계속해서 병세를 관찰하였습니다. 피실험자가 감염되어도 치료해주지 않고  그들이 모두 다 죽으면 실험자에게는 제일 만족스러운 성과였습니다. 731부대는 이렇게 각종 세균의 효력을 검사하기 위해 사격장(야외실험장)에서 생체실험을 하였습니다.

페스트 균으로 중국 도시들을 공격하고 숱한 실험 끝에  쥐벼룩 페스트 담은 도자기 폭을 만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731부대의 세균전은 전쟁범죄라는 비난만 불렀을 뿐 정작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진 못했습니다. 그토록 많은 '마루타'를 희생시켜 가며 생체실험을 했지만, 승리는커녕 기울어진 전쟁의 운동장을 바로 잡을 수 없었습니다. 1945년 5월 도쿄의 일본 육군 참모본부는 731부대의 세균폭탄 생산을 멈추도록 했습니다. 패전을 앞둔 마당에 세균전을 펼쳐 그들의 전쟁범죄 목록을 늘리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패전을 내다본 이시이는 제 살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의 생존 전략은? 승자인 미국과의 '더러운 거래'였습니다. 

 

 특이급 마루타

731부대로 '마루타'를 데려오는 것을 일본인들은 '특이급'(特移扱)이란 용어를 썼습니다. 특별 이송이란 의미를 지닌 마루타 수송은 관동군 헌병의 삼엄한 눈초리 아래 비밀리에 이뤄졌습니다. 8.15 패전 뒤 소련군에 붙잡혀 하바롭스크 전범재판(1949)의 피고석에 섰던 가와시마 기요시 세균제조부장은 '특이급된 마루타 가운데는 여성과 어린이들도 있었다'라고 털어놓았습니다. 

'마루타'는 대부분이 반일 성향의 비(非)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중국인이 다수를 차지했지만,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조선 독립투사들, 소수의 러시아인 포로들도 생체실험의 희생양이 됐습니다. '마루타' 숫자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3000명에서 5000명쯤으로 추산됩니다. 이들 가운데 이름이 확인된 사람은 270명쯤으로 대부분이 중국인이었습니다.

 

생체실험으로 희생된 조선 독립투사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731부대의 생체실험으로 희생된 사람들 가운데 조선 독립투사들도 여러 명이 있었습니다. 일본 군부는 1945년 패전 무렵 전쟁범죄 증거가 될 만한 서류들을 불태워 폐기했습니다. 731부대도 그랬습니다.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숨졌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1949년 12월 소련 하바롭스크 전범재판, 1956년 6월과 7월에 산시성 타이위완(太原)과 랴오닝성 선양(瀋陽)에서 열린 특별군사법정 등으로 731부대의 범죄 사실이 부분적으로 알려졌을 뿐입니다.

1990년대 들어 특이급 관련 문서들이 잇달아 발견됨에 따라 731부대의 죄악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 한 중국 방송국이 731부대 관련 다큐를 만들려고 헤이룽장성의 당안관(문서보관실)을 뒤지다가 관동군 헌병대의 '특이급' 문서 66건을 찾아냈습니다. 2001년에는 중국 지린성의 당안관에서도 '특이급' 문서들이 발견됐습니다. 이들 문서에는 731부대로 끌려간 조선인 고창률(高昌律), 김성서(金聖瑞), 한성진(韓成鎭), 이기수(李基洙) 등 4명의 이름과 나이, 본적이 적혀 있었습니다.

심득룡(沈得龍), 김성배(金成培), 김용권(金龍權), 조복원(趙福元), 장혜충(張慧忠), 조종박(趙宗博), 주지영(朱之盈), 손조산(孫朝山), 오전흥(吳澱興), 경은서(敬恩瑞) 등입니다(이들이 모두 731부대로 끌려가 숨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증언은 있지만, 관련 문서는 부족하거나 없습니다). 위에서 이름이 드러난 마루타는 270명뿐이라고 했습니다. 이름도 남김없이 죽어간 또 다른 조선의 독립투사들이 있었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김성배와 김용권, 이 두 독립투사들은 2016년 초에 방영된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731부대, 남한 첫 마루타 피해자를 찾다'에서 '남한 출신 마루타'로 소개됐습니다. 이들의 혼령이 만주 벌판을 지나 압록강을 건너 멀리 남쪽 고향을 찾아온다면, 친일파 후손들이 떵떵거리며 살고 '신친일파'들이 궤변을 늘어놓는 대한민국을 보며 어떤 탄식을 내뱉을까요. 참으로 한심한 대한민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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